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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5회 손병희 글짓기 공모전 은상 수상작 2017-12-19

제5회 손병희 글짓기 공모전 수상작

 

​은 상

 

중학교 3학년

​김 은 진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의암 손병희선생님

   

 

   201931일은 삼일독립 만세운동이 100년이 되는 뜻깊은 해가 될 것이다. 불과 16개월 정도 남았다. 201610월말부터 시작된 광화문 촛불집회는 매서운 추위도 이겨내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촛불혁명이라고 한다. 19193월에 광화문광장 그곳에서도 삼일혁명이 있었다. 이 혁명으로 대한민국이 건립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거부할 수 없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세대들은 98년 전 대한민국을 설계하셨던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희생정신과 당시 300만의 최대종교였던 천도교가 가지고 있는 국가적 책임을 성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천도교의 살신성인의 정신이 있었기에 성공적인 삼일혁명이 가능하였다. 삼일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의암 손병희선생님 정신을 새겨 보고자 한다.

 

1)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축적된 경험의 시간

 

   민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타고난 능력이 있더라도 이를 발휘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동학에 입도한 의암 손병희선생님은 해월 최시형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많은 지도를 받았다. 오래 동안 종교적 수행과 지도를 받았던 의암 손병희선생님은 서서히 동학의 지도자 반열로 부상하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 결과 동학혁명당시 해월 최시형선생님으로부터 통령으로 임명되어 동학혁명을 선봉에 서서 이끄셨다. 타고난 성품과 인정받은 지도력을 물론 동학의 깊이가 제자들 중에서 출중하여 해월의 뒤를 이어 동학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동학에 대한 도력과 해월 최시형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축적된 경험의 시간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의 축적은 경술국치 이후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계 할 수 있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을 냉철하게 진단하고 정확한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의 축적으로 인하여 삼일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었다.

 

2)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희생정신

   동학혁명과정에서 수많은 교인들의 희생을 경험한 의암 손병희선생님은 삼일혁명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성공적 완수를 계획하였다.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당시 300만의 최대 종교였던 천도교인의 희생 없이는 삼일혁명은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희생의 선두에는 10여 년간 철저히 준비한 의암 손병희선생님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나라를 일제에 침탈당한 후 10년 안에 나라를 다시 찿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 한적한 우이동에 봉황각을 지어 전국 각지의 천도교교구의 교구장 및 지도자를 봉황각에서 49일 동안 독립의식을 강화시키는 수련을 실시하였다. 10년간 이곳을 거쳐 간 삼일혁명 지도자가 무려 500여명 이었다. 이들 지도자에게 이신환성 (以身煥性) 즉 육신의 안락을 위한 삶을 성령의 참된 삶으로 바꾸라는 의암의 가르침을 따라 삼일혁명을 전국각지에서 성공적으로 동시다발적 수행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천도교 교역자들은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삼일혁명의 선봉에 서서 전국적인 혁명으로 가능케 하였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삼일혁명을 성공적으로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희생의 선봉에는 역시 의암 손병희선생님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3)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통합 정신

 

   당시 천도교 300만 교인과 충분한 재정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삼일혁명을 천도교 혼자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의암 손병희선생님은 가능한 각 계층 모두가 함께하는 혁명을 원했다, 천도교만이 아닌 모든가 함께하려고 노력했다. 기독교, 불교, 심지어 유교까지도 함께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재정적 어려움을 격고 있던 기독교에도 혁명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측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매국노 이완용에게도 직접 만나 독대를 하면서 거사를 같이 하자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이완용의 거절로 이완용의 거사 참여는 허사로 돌아갔다. 매국노 이완용에까지 삼일혁명의 대중적 성공 즉 일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대담함은 늘 수련을 하면서 얻어지는 도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거사 전날 친일 고등계 형사 신승희에 발각 되었어도 매국노 이완용이 나라를 팔고 받은 금액만큼의 돈으로 그를 무마시켰다. 이는 신승희에게는 돈보다는 자신이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으리라고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믿음에 감복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삼일 혁명 후 친일 고등계 형사 신승희는 결국에 자결을 하게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믿음에 응답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시대가 거부했던 자와도 함께하고 했던 통합의 정신은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수련을 통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4)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미래지향적 세계관

   의암 손병희선생님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세계의 정세를 파악하였다.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험에 처하자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비록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긴 했지만 러일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일본이 승전국이 될 것을 확신하고 일본을 도와 승전국의 지위를 획득하여 러시아를 몰아내고 차후 일본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즉 이이제이의 정책으로 나라를 구하려고 하였다. 국내 유능한 젊은 청년을 일본에 유학을 보내 선진교육을 받게 하였으며 재정이 어려운 교육계에도 많은 지원을 하셨다. 유학생들은 천도교인 뿐 아니라 종교를 가리지 않고 우수한 청년들을 보냈다. 이 역시 손병희선생님의 미래 지향적 세계관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또한 일본에서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을 목격하고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였다, 교인들에게 단발령과 흑의를 하게하여 천도교를 현대적 종교로 탈바꿈하여 시대에 보조를 맟추어 나가도록 하였다. 의암 손병희선생님은 세계의 흐름에서 천도교가 선봉에 서서 시대를 이끌어 가고자 했던 미래지향적 세계관과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5) 종교지도자에서 건국대통령으로

 

  동학에 입도하여 스승인 해월 선생을 모시면서 종교적 수행을 했던 의암 손병희선생님은 조선이 제국주의의 침탈현장 속에서 종교적 능력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동학은 수운 최제우선생님의 동경대전 포덕문의 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보국안민을 강조하셨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은 동학이 타 종교와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천주교 황사영의 백서사건은 나라보다도 종교적 신념을 우선시 하였다. 신앙적인 신념이 나라의 흥망보다 우선한다는 신앙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재의 삶을 중요시 여긴다. 나라를 적극적으로 도와서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의암선생은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기에 백척간두에 놓인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투쟁을 위하여 1908년에 천도교의 최고 지도자로 춘암 박인호선생님에게 대도주의 도통을 전수하였다. 이 후 본격적으로 봉황각에서 전국 각지의 지도자를 양성하여 삼일혁명을 준비하였다.

  해방 후 김구선생님을 비롯한 임시정부요인들이 우이동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김구선생님은 천도교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은 바로 의암 손병희선생님의 희생으로 이루어 졌다고 할 수 있다.

 

맺는말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삼일혁명으로 임시정부가 수립 되었다. 그 중심에는 의암 손병희선생님과 가장 많이 피 흘린 천도교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광화문에 밤늦게 촛불을 밝혔던 촛불혁명의 뿌리도 역시 삼일혁명이다.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의 삼일혁명 정신이 우리의 역사 속에 있기에 가능했다. 역사는 미래이다. 동학혁명의 미래가 삼일혁명이다. 삼일혁명의 미래가 4.19혁명이고, 5.18민주화운동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광화문 촛불혁명의 울림이 세계화된 지금 사람이 하늘처럼 존경받고 차별이 없는 세상 사인여천 인내천의 새 세상이 실현되는 새로운 혁명을 기대한다.

 

 

 
  제5회 손병희 글짓기 공모전 동상 수상작
  제5회 손병희 글짓기 공모전 금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