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손병희 글짓기 공모전 수상작
동 상
김 회 선
다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잠들기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단순한 꿈이었을까. 나는 꿈과 현실의 몽롱한 관계에서 정신을 헤매다가 곧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분명 말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나는 선생님의 배움대로 배우고 익혀서 기쁨을 느끼기 위해 펜을 들었고 지금 바로 그 글을, 아니 우리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不亦說乎)
그는 붉어진 두 눈시울을 하고서 내게 물었다.
“자네에게 정말 묻고 싶은 말이 있네. 조국은... 해방되었는가.”
순간적으로 뜨거워진 심장을, 손끝으로 몰리는 뜨거운 피를 억누르며 나는 대답했다.
“조국은...”
바야흐로 내가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일주일 전 일이었다. ‘손병희 전기’ 발췌 글을 읽은 그날의 나는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서러움에 가득 차 있었다. 현명한 지략으로 뜻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량을 가진 손병희 선생님이,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떠난 것이 못내 비통했던 것이다. 나는 그 비통함 속에서 허덕이다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둔탁하게 울리는 두통을 느끼며 간신히 눈을 떴을 때, 훔친 빵을 가지고 달아나는 소년과 역정을 내며 그 소년을 쫓는 빵집 주인의 모습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은 누가 설명할 수 있으랴. 잠들기 전 읽었던 ‘손병희 전기’ 발췌 글 속 경성의 모습이 한눈에 펼쳐진 것이다. 나는 재빨리 두 볼을 꼬집었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고통이 느껴졌고 심지어는 두 볼을 꼬집는 내 손은 거친 남성의 것이었다.
그리고 흥분감에 달뜬 얼굴로 주의를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저 얼굴은 분명, 발췌 글을 읽고 난 뒤 인터넷에서 찾아본 권동진 선생님의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인물 한 명이 있었다.
“오세창 자네. 여기서 뭐 하는가. 오늘은 시국 문제를 논의하러 손병희 선생님을 뵈러 가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 그러니까 내가 오세창이라는...”
“허어-자네, 꿈이라도 꿨는가. 이 시국에 참 팔자 좋은 소리를 하고 있네만, 선생님과 약조한 시간이 다 되어가니 얼른 따라 나서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 그를 따라나섰고 그렇게 한참 걸었을까. 드디어 나는 발췌 글 속의 중심인물인 손병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꽤 나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세월의 흔적이 무색할 정도로 선생님의 기풍은 대단했다.
“독립 달성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네.”
나는 그 순간 쿵쿵,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바로 이 장면은 내가 문자로만 읽어 내렸던 장면이 아닌가. 그러나 설레기도 한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실제 오세창이 아닌 내가 이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시국을 논의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하지만 이내 곧 나는 손병희 선생의 근엄한 얼굴과 당찬 포부를 들으며 어느새 경청하게 되었고 다행히도 발췌 글을 읽었기에 그들의 이야기 흐름에 무리 없이 섞여들 수 있었다.
“무력 봉기를 시도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일제의 탄압은 강해져가고 있고 그들의 우월감은 경성을 뒤엎고 있습니다. 오늘 경성에서 한 아이가 배고픔에 허덕이다가 빵 하나를 훔쳤습니다. 그 소년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바로 그 주인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빵 부스러기를 쥐고요. 선생님. 무고한 민족들이 이젠 서로를 향해 날선 칼날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부디 그들이 향하는 칼이 조국이 아닌 일제여야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바로 그 당시의 비참하고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과 그 현실 앞에 조우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얼마나 괴로울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이어서 그가 단번에 문제점을 직시하며 이야기했다.
“1894년 갑오 혁명의 실패를 기억하는가. 단순히 적개심만으로는 승산이 없네. 나는 또다시 그날의 쓰디쓴 실패를 겪고 싶지 않네.”
“그렇다면 대중시위를 동원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을 향해 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건의가 문제점이 많음을 발췌 글을 통해 읽었음에도 나는 자연스레 오세창이라는 인물에 투영된 것이다.
“그러기엔 지도자가 부족하네. 게다가 대중들이 자칫 폭력시위로 변질될 수도 있지.”
이번엔 권동진 선생이 문제점을 토로했다. 나는 그들과 토로하고 이야기하면서 가슴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었다. 만일 내가 그 시절에 살았던 인물이라면?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대의를 위해 나서는 투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비겁하게 뒤로 숨고 일제에 굴복하고 마는 조국의 배신자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왜 조국을 위해 무모하게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작은 희망의 씨앗이 자라 해방이라는 꽃을 피워 낼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는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그 씨앗의 밑거름이 될 생각을 하니 이젠 설레기까지 했다.
이어서 우리는 외교활동 전개, 독립청원서 제출, 독립선언문 발표와 발송 등을 논의하며 앞으로 더 좋은 방안을 찾도록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동안 권동진 선생과 나는 고등보통학교를 찾아가 최린 선생과 만나는 등 자주 민족운동 전개방법에 대해 협의했다. 최린 선생은 발췌 글을 통해 접했던 것과 같이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정, 그리고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존경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드디어 독립선언서 작성이 진행되었는데, 나는 손병희 선생이 제시한 선언문의 방향을 직접 말로 듣게 되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그 방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정말 대단한 지략을 가진 인물임을 느낄 수 있다.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단순히 적대국의 우월감에 분노하고 반발심에 불과한 감성적이고 우발적인 것이 아닌, 우리의 운동은 당연한 지위를 얻기 위한 것이며 동양의 평화를 위한 독립이므로 결국은 이 문제는 일제에 대한 우리의 단일한 횡포가 아닌 모두의 문제에서 바라봐야 하는 시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내가 타임 슬립을 한지 어언 며칠이 지났을까. 그가 나를 따로 불러내어 담소나 나누자고 했다. 단둘이라는 것이 조금 어색했지만 선생님과의 담소라니, 영광으로 드리워진 내 얼굴은 어느새 붉게 물들여 있었다. 그는 내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요 며칠 전 괴이한 꿈 하나를 꿨네. 지금 시대의 옷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차림새의 남성이 나타나 미래의 사람이 바로 이 땅에 오게 될 것이며 그 인물은 내 가까운 곳에 있다고.”
나는 순간 술을 마시다 사레에 걸려 피를 토하듯 기침을 했다. 그러자 감사하게도 그가 내 등을 두드려주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오세창을 오랫동안 봐왔네. 평소 습관과 행동까지도. 그래서 생각했지. 혹시 자네가 미래에서 온 인물이 아닌가 하고 말일세.”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미 확신에 찬 그의 말에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사실은 미래에서 온 사람이 맞습니다. 혹시 실망하지는 않았습니까? 저 같은 자가 오세창이라는 훌륭한 선생의 몸에 들어가 앉다니요.”
“허허-. 미래에서 온 선생은 참 재미난 사람인 것 같네만. 당치도 않는 말일세. 나는 오히려 기쁨을 느꼈지. 나의 후손인 자네가 이렇게 멋진 인품과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해방에 대한 향수가 오히려 더 짙어졌네. 후손을 위한 죽음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될 만큼 말일세.”
어쩐지 그 말이 조금 슬프게 느껴졌는데, 나는 이미 그가 태화관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옥살이를 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시대는 그를 훌륭한 지도자로 여기고 있고, 아름답고 숭고한 정신을 가진 그에게 그 사실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곳에서 선생님은 민족대표 33인으로서 훌륭한 지도자였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매국노 이완용이 거사계획을 누설시키지 않을 것을 어떻게 장담하였는지요.”
“장담이라. 사실 호언장담은 아니었네. 하지만 믿고 싶었지. 결국 그자도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우리 민족 아니겠는가. 기억하게나.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네. 조국이 해방될 것이라는 믿은 만큼이나.”
“제가 더 놀랐던 것은 그런 자가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면 모두 독립을 원한다는 결과가 아니겠냐고 했던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한 것인지 저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후손에게 듣는 칭찬이라고 생각하니 참 부끄럽네만. 그만하면 충분하네.”
그는 술기운 때문인지, 정말 부끄러워서 그랬는지 몰라도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자넨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
“저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비록 최남선 선생이나 이광수 선생처럼 멋지고 뜻 있는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요. 아주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그러자 그는 짧은 시 한 편을 지어주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퍼뜩 떠오르는 시어나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헤매다가 그의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저의 시대엔 삼행시라는 것을 종종 짓곤 합니다. 이름의 운을 읊어 짧은 시를 짓는 것이지요. 한 번 선생님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 보겠습니다. 운을 한번 읊어주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약간 기대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손.”
“손을 마주 잡고 바라보았습니다. 오랜 투쟁으로 많이 힘들어 보였지요.”
“병”
“병든 세상에 약을 주기 위해 민족을 위한 지략을 펼쳐내는 모습이 너무도 멋있었지요.”
“희”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굳건하게 의지를 심어주는 선생님은 정말 숭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후손을 위해 애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그는 곧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얼굴이 되었는데, 오히려 먼저 눈물이 흘러나온 건 내 쪽이었다. 나는 이유 없는, 하지만 쓰라린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나는 그대를 만나서 정말 기쁘네. 정말 멋진 후손을 위해 싸웠다는 생각이 들었지.”
“저야말로 선생님을 통해 그동안의 제 행동을 많이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처럼 저는 마음먹고자 한 것을 실천으로 옮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치기어린 피해의식 속에서 자기방어만 한 채 살아왔지요. 하지만 선생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앞으로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때론 익혀서 기쁨을 느끼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배움은 조국과 민족의 기쁨이 되었지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 즉 이미 자네는 나와 뜻을 함께 했네. 나도 자네를 통해 많은 것을 익혔고, 그것이 바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뜻을 이행하고자 하는 자네의 마음가짐이라네.”
선생님은 웃으며 내 등을 토닥여주었는데, 그때 나는 많은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조국은 물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우리 운동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를 근본으로 이루어질 걸세. 그렇다면 자네 시대에선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가.”
“저희는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섭니다. 태극기를 가슴에 심고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며 거리를 횡진하지요.”
“촛불이라... 빛을 낼 수 있는 뜻있는 젊은이들이 미래엔 많은 것 같아 다행이네.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밤새 나와 함께 담소는 나누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고등계 형사 신승희가 보성사를 덮친 사건이 발발했지만 발췌의 기록대로 그는 대의를 누설하지 않았다. 끝내 독약으로 자살했다고 하는데, 선생님 말대로 그들도 결국 같은 피가 흐르는 일말의 양심은 있는 민족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민족 대표 33인이 선발, 확정된 날. 나는 선생님을 다시 찾아뵈었다.
“선생님. 당일 젊은이들이 태극기를 펼쳐들고 파고다 공원으로 향하며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선생님들이 태화관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의를 앞두고 이런 말을 해야 될지 망설였지만 말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이번 운동이 성공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말의 요지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네. 자네는 이미 이 운동의 결말을 알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난 듣지 않겠네. 이미 뜻을 이행하고자 했으니 말일세. 물론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건 아니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줘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네. 자네 시대의 촛불처럼.”
방금 선생님의 말은 발췌 글 속에서도 읽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말을 육성으로 들으니 나는 꼭 선생님이 쥐고 흔드는 태극기가 된 것처럼, 선생님이 만세를 외치는 두 팔이 된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익히면 기쁨이 온다네. 난 조국을 위해 배움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며 그것은 나의 큰 기쁨이라네.”
그리고 곧 그가 내 두 손을 잡으며 붉어진 두 눈시울을 하고서 내게 물었다.
“자네에게 정말 묻고 싶은 말이 있네. 조국은... 해방되었는가.”
순간적으로 뜨거워진 심장을, 손끝으로 몰리는 뜨거운 피를 억누르며 나는 대답했다.
“조국은...”
그의 두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해방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에서 참아왔던 눈물이 흘러나왔고 나는 둔탁한 두통을 다시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기 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방된 국가에서 다시 만났으면 하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자네가 우리의 이야기를 써주게나. 여기 나와 자네, 그리고 두 팔을 올리며 태극기를 흔드는 민족이 있었다고...”
다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잠들기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단순한 꿈이었을까. 나는 꿈과 현실의 몽롱한 관계에서 정신을 헤매다가 곧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분명 말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나는 선생님의 배움대로 배우고 익혀서 기쁨을 느끼기 위해 펜을 들었고 지금 바로 그 글을, 아니 우리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