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손병희 글짓기 대회 금상 수상작
3‧1 선언서와 3‧1 정신
김은진
손병희 선생님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지도자이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병희 선생님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성품과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어릴 적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늘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어릴 적 선생님의 한 일화에 의하면 친구의 아버지가 관가의 돈 100냥을 축내어 감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친구에게 자기 집의 100냥을 몰래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덕에 친구의 아버지는 풀려났지만 선생님의 집에서 큰 난리가 났습니다. 선생님이 사실을 말하자, 아버지께서는 친구가 어려우면 돕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며 오히려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착한 마음씨와 남다른 용기가 있었기에 훗날에 최고의 민족 지도자가 되실 수 있던 것 같습니다.
1919년 2월 28일에 민족 대표끼리 논의를 하여 몇 가지 합의를 합니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원래는 탑골공원에서 할 계획이었지만 비폭력정신에 따라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여러 국민들이 다칠 것을 염려하신 손병희 선생님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도 고려하시며 3‧1운동 계획을 철저히 세우신 선생님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손병희 선생님은 순국을 결심하시고 결국 자진체포되십니다. 선생님은 조직적으로 3‧1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천도교 대교당 건설을 구실로 하여 모금활동을 시작합니다. 조선총독부에서 정부 압수수색을 할 때는 각 지방에 반환하도록 위장공작을 펼쳐 비밀리에 계속 500만원을 모금합니다. 3‧1독립선언서는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천도교인 이종일사장이 인쇄를 담당했고, 그 뒤로 최남선, 초고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3‧1운동의 참가자 200만명, 전 국민의 10% 이상이 참여했다는 점이 저는 너무 놀랍습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나라를 위한 희생정신이 빛난 3‧1독립운동이었습니다.
임시헌장 등 헌법제정 당시 대통령은 이미 손병희가 추대되었으나 일경에 체포되어있으므로 국무총리에 이승만, 신익희는 내무총장 대리 겸 차장에 선정되었습니다. 일경만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손병희선생님이 더 알려졌을 텐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손병희 선생님은 후계자 박인호에게 천도교의 앞날을 맡기며 순국을 결심했습니다. 선생님은 앞날에 큰 수난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3‧1운동을 통해 독립을 하고자 했습니다.
3‧1운동 전과 후의 우리민족은 완전히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족의 강한 정신이 되살아났고 그런 정신으로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하여 광복 후 힘든 시기가 닥쳤습니다. 하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여서 지금의 우리나라가 왔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조사하다보면 항상 의문점이 하나 듭니다. 이렇게 3‧1운동에 엄청난 기여를 하시고 최고의 민족 지도자로서 훌륭한 성과를 내신 손병희 선생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은 것일까요?
제 주변 친구들에게 나는 천도교에 다닌다고 하면 아는 친구가 한 명도 없습니다. 손병희 선생님을 아는 친구도 매우 드물죠.
수업시간에 역사공부 중 3‧1운동, 독립에 관한 얘기가 나와도 온통 유관순열사 얘기 뿐입니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이죠. 앞으로는 교과서에도 손병희선생님과 천도교에 관하여 많이 실렸으면 좋겠고, 우리 모두가 손병희 선생님이 잊혀지지 않게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