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상
손병희 선생님을 생각하며
목포 덕인중학교 3학년 전대산
우리에게 소소거사로 널리 얼려진 의암 손병희 선생님은 나라 사랑 정신이 남달랐던 어른 같았다.
동학과 천도교라는 종교의 지도자이면서도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조선의 독립운동에 누구보다 용감하게 발 벗고 나섰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손병희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약하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이 강했기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싶은 생각이 누구보다 강했고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형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당당하면서도 불처럼 뜨거운 의협심이 나라사랑의 튼튼한 뿌리가 된 것처럼 보였다.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도하여 최시형과 함께 최제우를 구하기 위한 신원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일본인의 배척을 주장한 것은 그 때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의 주권을 함부로 빼앗은 일본과 힘을 상실한 조정의 무능으로 날이 갈수록 세상이 혼란해지자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늘어나고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대항해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교도들과 힘을 모아 대일 항쟁을 활발하게 전개한 것은 힘없는 백성들도 계속되는 폭정을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 같았다.
이처럼 동학이라는 종교를 초월한 바르고 성실한 생활태도가 최시형에게 인정받아 최시형이 체포되자 3세 교주로서의 모든 일을 도맡게 되었고 최시형이 감옥에서 처형되는 바람에 교주가 된 뒤에는 여러 지방을 돌며 동학의 재건에 힘쓰고 미래의 인재 육성에 대한 교육투자야말로 가장 효과적임을 알고 교육에 힘쓴 것만 보더라도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어른이었음을 엿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동학정신을 되살려 본래의 종교운동으로 되돌아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강조하고 지금의 세상이 이와 같이 혼탁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란한 때문이라면서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실학사상은 나날이 변화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깨우침을 던져 주는 것 같았다.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와 연합국의 승리로 국제정세가 일본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독립에 유리해지자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로 약속한 것은 천도교주인 손병희를 독립운동가로 변모시켜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손병희는 천도교라는 종교의 대표 자격으로 3·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다수가 참여 할 수 있도록 대중화 시키는 한편 손에 살상무기를 전혀 들지 않은 비폭력으로 진행할 것을 합의하고 천도교 직영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자신의 집에 보관한 것은 목숨을 건 모험과 같았다.
더구나 공개적인 장소가 아닌 중국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은 우리 민족의 간절한 소원을 전 세계에 알리는 커다란 외침이었다.
만약 우리가 일본의 총칼이 무서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일본은 우리를 자신들에게 대항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로 알았겠지만 동양 평화와 자주 독립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현한 손병희 선생님은 민족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독립의 불씨를 되살려 준 훌륭한 어른이셨다.
나는 3·1운동의 주동자라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3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금고로 풀려났으나 숨을 거두는 바람에 샛별 같은 빛으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앞길을 환하게 비춰주던 민족 지도자를 잃은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오늘 만난 손병희 선생님은 독립을 바라는 우리 민족의 대변자였다.
우리들이 모두 움츠리고 있을 때 맨 앞에 서서 독립을 바라는 3.1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실행한 용기 있는 모습이 우리 민족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살아 있는 증거와 같았다.
이제 민족 지도자인 손병희 선생님은 가고 없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3.1 독립 운동을 주도한 손병희 선생님의 큰 뜻을 오늘에 이어 받아 둘로 갈라진 이 땅을 하나로 통일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교훈 하나를 가슴속에 되새길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