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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사)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손 윤 이사장입니다.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92주기 추모식(제16차 의암경영세미나)
□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추도일 제정을 위한 토론회
○ 일시 : 2014년 5월25일 (일) 14시
○ 장소 : 수운회관 1층 (사)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서울 종로구)
□ 주최 : (사)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 후원 : 해커스 교육그룹, 오늘TAC 조세전문그룹
(약 7분 15초부터)
사회자 질문 :
의암 손병희 선생의 인내천 사상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김용휘 교수 :
손병희 선생이라 하면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편하고 천도교 교주, 천도교 종교지도자, 33인 민족대표라고 알고 있는데, 사상적으로도 굉장히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1910년에 양산 통도사 수련을 하고 나와서 지으신 무체법경이라는 경전을 보면 굉장히 철학적으로 깊으며 천도교의 신앙체계를 정립하고 있습니다. 무체법경이야 말로 손병희 선생님의 대표적인 글인데요. 인내천은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면서 근대적인 종교체계를 정립하면서 천도교의 종지로 정하게 됩니다. 수운 선생님의 시천주 사상(모든 사람은 하늘을 모시고 있다), 해월 선생님은 사인여천(모든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섬겨라), 심즉천(마음이 하늘이다), 인시천(사람이 하늘이다). 이런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손병희 선생님이 인내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시천주는 자기 안에서 하늘을 보겠다는 것에 중점이 있다면 인내천은 그러한 철학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내천은 알지만 시천주는 모르는 경우도 있는데 시천주에 기반한 인내천이어야 합니다. 시천주 바탕에서 인내천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 무체법경입니다. 무체법경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몸과 마음과 성품의 3가지 결합으로 보며 그중에서 무엇이 자신의 본성이냐면 성품입니다. 그 성품이라는 것은 하늘 본체로서의 성품으로 모든 사람들의 본성으로 내재되어있다. 천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것이 이신환성입니다. 육신에 사로잡혀있지 말고 본래의 하늘 본성으로 내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나라는 것을 깨달아가지고 그것이 유지되는 삶을 살아라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이해를 하면 독립운동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라는 뜻입니다. 1912년부터 봉황각을 만들고 483명을 교육을 시켰는데 거기서 이신환성을 교육시켰던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서 독립운동해라는 것입니다. 몸이 내가 아니므로 몸을 벗어던지고 내안에 있는 참나. 그 성품이 나이기 때문에 육신은 한때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하라고 하신 것이고, 누누이 천도교 신도들 앞에서 말씀하신 것이 우리는 오로지 독립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지 교회가 먼저가 되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손병희 선생님이 가장 중요시 했던 것은 독립운동이었고 그래서 3.1운동을 주도하셨고 그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셨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국이 맞고 또 평생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의 이치를 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고 그것이 구체화되어 나온 것이 철학적 체계를 갖춘 글로 드러났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것이고 그런 점에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도를 위한 죽음이었고 나라를 위한 죽음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약 15분 15초부터)
사회자 질문 :
환원이라는 용어는 일반신도가 세상을 떠났을때 쓰는 용어입니까?
김용휘 교수 :
그렇죠. 그런데 교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하나의 본체, 하늘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손병희 선생님의 경우는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었고 도를 위한 죽음이었고 나라를 위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냥 환원이라고 해서는 안되고 순도 · 순국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약 16분 09초부터)
사회자 질문 :
이사장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순국 추도일 행사를 갖겠다고 하니까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천도교 의절에 맞지 않다고 답변이 왔는데요. 수운 대신사님, 해월 신사님, 의암 성사님, 춘암 상사님. 이 분들에 대한 기일을 기념하는지 천도교 의절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손 윤 이사장 :
이번 기회에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의암 성사님이 돌아가신 날을 환원이라고 하면서 추모제는 의절에 없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천도교 의절을 살펴보니, 마지막 개정일인 포덕 139년 개정이 마지막인데, 수운 대신사님, 해월 신사님은 순도일로 되어있고, 의암 성사님, 춘암 상사님은 환원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천도교를 잘 아시는 다른 분에게 물어보니 수운 대신사님과 해월 신사님은 참형, 효수형을 당했으니까 순도지만, 의암 성사님은 비록 독립운동을 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고 하나 (일단 나와서) 병보석으로 나와서 돌아가셨으므로 환원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입니다. 천도교의 많은 석학들은 순도가 맞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의암 성사님의 일생은 순국 · 순도라고 표현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위대한 일생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의암 성사님은 3.1독립선언으로 대한민국을 만드신 분입니다. 1919년 이전에는 헌병정치 무단정치였고, 1919년 이후는 문화 정치였습니다. 겉으로는 문화정치를 해서 천도교와 국민을 편하게 했지만, 실제로는 천도교를 죽이기 작업을 했습니다. 조선총독부 칙령을 보면 기독교와 불교를 권장하고 천도교와 대종교는 탄압하고 죽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손병희 ⇒ 천도교 ⇒ 독립운동 ⇒ 천도교인 ⇒ 대한민국이 생각나던 시대였습니다. 김성수 선생님은 손병희 선생님을 일대위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일제는 손병희 선생님을 순국이라고 표현하지 못하게 하고 환원이라고만 표현하게 한 것입니다. 당시에 천도교 박인호 춘암 상사님을 빼고는 친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 계략에 의해 손병희 선생님을 환원이라고만 표현하고 순국이라고 표현 못한 것입니다. 일부 지각있는 천도교인들이 순국은 당연하고 순도도 당연하다고 한 것이 맞는 말인 것입니다. 의암 성사님의 일생은 개인의 삶이 아니었고 국가의 삶, 종교의 삶을 살았으므로 순국 · 순도라고 해야 합니다.
사회자 답변 :
네. 이사장님 말씀 고맙습니다. 이사장님 말씀을 들어보니 환원이라는 용어는 극단적으로 보면 일제 식민사관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약 23분 25초부터)
사회자 질문 :
천도교가 일제 · 해방 전후하여 신도수가 줄었습니다. 기독교의 성장은 인위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일제가 어떻게 민족종교를 탄압했고 해방 후 정권이 어떻게 기독교를 성장시킨 것인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용휘 교수 :
1918년 신문을 보면 천도교 115만, 기독교 15만, 불교 15만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보긴 하지만, 천도교 교단 내부에서는 300만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보통 밖에서 보는 시각과 안에서 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좀 있으므로, 천도교 신도수는 약 200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1운동 이후로 일본 총독부가 천도교를 집중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례만 말씀드리면, 천도교의 신앙을 말살하기 위해 매주 일요일 시일 예식을 보는데 예식 오기 전에 순사 2명이 교당 입구를 지키고 있으면서 60대 이상만 넣어주고 나머지는 예식을 못 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도 해방 무렵에 200만 정도는 유지를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해방되면서 천도교는 북한에 80% 교인이 있었는데 분단되면서 남한에는 20%가 안 되니까 군소종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는 북한의 교인들이 남하하기도 했고,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다 보니까 의도적으로 (처음에는 천도교인들이나 대종교인들이 내각에 있었으나) 향후 천도교인들과 대종교인들을 다 잘라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탄압을 했습니다. 그리고 미군정을 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대거 고용되게 됩니다. 그때 기독교가 급속도로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는 한국사회는 서구화, 미국화 되면서 기독교가 확산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부각된 인물이 유관순입니다. 오늘날 3.1절 행사 등에서는 유관순만 언급되고, 손병희 선생님은 언급되지 못하고 있는데, 해방되는 그 무렵에 이화여대의 총장을 했던 모인사가 자신의 친일 행적을 세탁하기 위해 유관순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손병희의 역할을 폄하한 부분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3.1운동의 역할을 더 부각하면서 손병희 선생님의 역할은 폄하하면서 등장한 것이 유관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입니다. 친일했던 사람이 친미로 돌아섰고, 독립 운동했던 사람을 빨갱이 · 좌파로 몰아가게 되면서 역사를 왜곡시키면서 자신들의 친일을 세탁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오늘날 까지 이어지면서 그 때문에 친일청산이 안되고 독립 운동했던 분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한국현대사의 큰 문제이며 굴절과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손병희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 30분 05초부터)
사회자 질문 :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재평가, 친일 내지 기독교화 된 대한민국을 민족사상으로 재무장하기 위해서는 저희 나름대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할 것입니다. 손 윤 이사장님께서는 식민사관 인터뷰를 하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 지금이 의암 손병희 선생님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손병희 선생님의 정신 가운데 어떠한 전략, 전술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손 윤 이사장 :
방금 김 박사님께서 말씀했듯이, 대한민국의 현대사, 근대사를 보면 정치, 경제 모두 포함해서 손병희 선생님의 업적이나 사상 철학이 떨어지고 유관순이 대체하는 과정에서 그런 상황이 100년 가까이 흐르다보니 뭐가 옳은지 뭐가 그른지 가치관이 실종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남북까지 분단되어 있어서 더 그러합니다. 100년 전 손병희 선생님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위해서 와신상담했던 그 시대보다 더 나빠진 것 같습니다. 최근 세월호 사건을 보면 바로 도전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살고 부유해도 마음이 상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린애가 잘 되라고 교육해도 나라에 원로가 없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남의 나라 가치관, 남의 나라 종교 가치관을 인위적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 식민지 속국도 아니며 5천년 자주독립 국가인데 이렇습니다. 손병희 선생님과 천도교의 정신은 세계적 정신인데 그런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나라에 도가 없고 종교적 원로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가 없고 정신이 없는 상황이므로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교육이든 정신없이 도없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서양철학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배고픈 게 배부른 돼지보다 낫다. 손병희 선생님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일본에 유학하면서 세계 문물을 배우면서 우리나라가 도가 없어서 나라를 뺏긴 것이 아닙니다. 도는 동방의 제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 둔 것이 삼전론입니다. 첫째가 도전이고, 둘째가 언전이고, 세 번째가 재전인데, 어떻게 따지면 가장 중요한 것이 도전입니다. 손병희 선생이 동학혁명을 주도하고 삼일독립선언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을 만든 그 정신에는 천도교인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천도교인의 희생은 바로 천도교, 동학의 정신입니다) 아까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시천, 사인여천, 인즉천 즉 사람이 하늘이라는 그런 지고한 가치가 있었기에 사람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보자는 손병희 선생의 민주적인 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남북을 화해시키고 남북을 통일시키고 세계1등 국가가 되려면 손병희 선생님의 도전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는 천도교만의 정신이 아니라 민족고유의 정신이고 세계화 할 수 있는 정신입니다. 그것을 간단히 말하면 인즉천, 인내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정신이 필요하냐면, 보통 사람의 행복기준을 따질 때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양쪽 주머니에 금은보화가 있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그것이 바로 손병희 선생님의 도전 정신입니다. 사람 중심의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왜 지금까지 우리가 이렇게 자리를 못 잡고 남북분단과 철학도 없냐면 그런 도전정신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 중심의 가치가 없었던 것이죠. 그것은 역사에서 손병희 선생을 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가치를 되찾고 그것을 세계화해야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고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암경영연구소나 기념사업회에서 하는 것은 도전, 재전, 언전을 얘기하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도전정신입니다. 기념사업회에서 할 일이 이런 도전정신을 역사, 경제, 정치, 사회, 문화인들에게 많이 알려서 5천년 역사 하에 손병희 선생과 같은 위대한 선열들의 희생 하에 한국이 성장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도전 정신은 어느 종교를 떠나서 우리의 가치관으로 세계화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미국의 석학들도 동학을 연구하고 천도교의 신관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세계화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기념사업회를 하면서 세미나를 계속 하면서 손병희 선생의 죽음을 순도냐 순국이냐 그렇게 따지자는 것이 아니고, 그 숨어있는 그 큰 뜻이 국가관, 가치관이라고 생각하므로 이런 사업을 계속하고 세미나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토론회와 같은 순국, 순도일 제정을 하고자 하는 것이 그런 뜻에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나라를 뺏긴지 100년이 다되어갑니다. 100년이 지나버리면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100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천도교 경전에 보면 해월신사님의 말씀을 보면 인사는 10년이라고 했습니다. 10년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최소 단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어린이 사업, 학생 교육 그런 것과 같은 10년 동안 잘 가르치고 씨앗을 뿌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돈도 벌어가면서 즉, 재전을 하면서 연구도 하고 출판도 하고 교육도 하여 손병희 선생의 도전정신 즉, 삼일정신 비폭력, 일원화(통합정신), 대중화(민주화) 3대 정신을 오늘날 되살려서 사람 중심의 사회, 마음을 치유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념사업회를 만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토론회와 같이 순국, 순도일 제정하자는 것이지, 손병희 선생과 같이 위대한 분에게 순국이면 어떻고 순도면 어떻겠습니까? 저 분은 대한민국을 만드시고 오늘날 우리의 사회 가치를 만들었고 삼일독립선언을 영도하신 분입니다. 저분이 대통령이 된 이유는 당시 블라디보스톡은 마치 지금의 LA 처럼 교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입니다. 무려 50만이 살았다고 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경술국치 후 독립운동 하신 분들이 다 쫓겨나서 간곳이 블라디보스톡입니다. 거기서 지식인들이 다 모인 것입니다. 거기서 10년 동안 손병희는 거기서 어떤 사람이었냐? 손병희는 민주조선의 실제 리더였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삼일운동을 리드했으니까 당연히 초대 대통령으로 인정되었던 것이고 국부였으며 민족의 영도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분을 초대대통령이라고 하는 것이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초대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초대 대통령, 국부, 민족의 영도자였습니다. 단지 33인의 대표였던 것이 아닙니다. 기념사업회를 하는 것은 손병희 선생의 도전정신, 삼전론, 삼일정신을 국민들에게 알려서 결국 잘 살자는 것입니다. 손병희 선생의 삼전론을 경영학과 결합시켜서 사회에 내놓을 것이고 삼일정신을 일반시민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손병희 선생 정신을 끌어올리면 고구마 줄기처럼 다 따라 올라와서 5천만 국민이 다 따라 올라와서 세계 1등국가가 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약 43분 10초까지)
5월 19일은 의암손병희 선생께서 순국·순도한 날 -순국, 순도일 제정을 위한 토론회 자료- |
Ⅰ. 추모사(의암성사 묘소 현창)
손병희선생님은 3․1독립선언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신성한 민족적 유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선민족의 최고지도자로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순국하기로 결심한 후,
의암성사(의암손병희)는 오만년 대종교인 천도교의 교무를 대도주 춘암박인호에게 맡긴다는 유시문을 남겼습니다. 선생님께서 경영하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와 동덕여학교의 교주(校主)도 내려놓았습니다.
100년 전 조선민족의 정치 및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천명했던 조국광복과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 건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이곳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에서 ‘조선의 독립국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시고 자진해서 일본헌병에 체포됩니다.
이윽고, 수감된 손병희선생의 뜻과 준비된 국가경영전략에 따라, 전제왕정을 타파하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제의 대통령제 정부는 서울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해외에서는 서울본부에서 파견된 밀사들과 모든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연대계획에 따라 망명정부의 구성 등 정부수립의 임무를 수행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합법적으로 탄생됩니다.
세계 10대 경제강국이라는 대한민국하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의암손병희선생님을 위시한 순국선열들의 삼일정신과 대한민국 건국의 살아있는 역사를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Ⅱ. 순국의 길
1919년 2월 28일 밤 가회동 자택에 마지막 회합을 위하여 모인 25명(천도교 대표 13명, 기독교 대표 10명, 불교대표 2명)에게 의암성사는,
“금번 우리의 의거는 위로는 조선의 신성유업(神聖遺業)을 계승하고 아래로 자손만대의 복리를 작흥(作興)하는 민족적 위업입니다. 이 성스러운 과업은 제현의 충의에 의지하여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라고 말씀하신 후,
참석한 민족대표 서명자들과 논의 끝에 세 가지를 합의했다.
첫째, 명월관지점인 태화관에서 오후 2시에 독립선언을 하기로 한다.
→ 당초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던 원래의 계획을 변경한 것인데, 이러한 결정에서 우리는 비폭력정신에 따라 일제의 강제진압으로 학생과 국민들이 다칠 것을 염려한 최고지도자 손병희의 살신성인 리더십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둘째,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문의 전달자로 이갑성을 지정한다 → 독립선언의 정당성을 알린 것이며, 민족적인 자긍심을 일제에 공식 통보한 것이다.
셋째, 민족대표로 선언한 참석자 전원이 독립선언 후 정정당당하게 행동통일을 하기로 하였다 → 결국 손병희선생님은 순국할 의사를 표명하고 일제경찰에 자진해서 체포되셨다.
Ⅲ. 순도의 의미
- 천도교의 앞날을 박인호대도주에 맡기다
유시문(諭示文) 불망이 오교의 교무를 좌하에게 전위함은 기위십수년이라 갱설할 필요가 무하거니와 금일 세계종족평등의 대기운하에서 아동양동족의 공동행복과 평화를 위하여 종시일언을 묵키 불능하므로 차에 정치방면에 일시 진참케 되었기 여시일언을 신탁하노니 유 좌하는 간부제인과 공히 교무에 대하야 익익권정하야 소이망동하고 아오만년 대종교의 중책을 수호진행할지어다. 대정 8년 기미 2월 28일 의암 손 병 희 대도주 박인호 좌하 |
Ⅳ. 검찰심문조서
*1919.3.7~11.1. 경무총감부 일본검사의 손병희심문조서
1. 갑오년 동학혁명을 일으킨 동기와 지위
- 척왜척양 인류평등의 창의(斥倭斥洋 人類平等의 倡義)
의암성사 왈, “정부는 탐관오리가 있어 무고한 백성을 벌하고 재산을 빼앗고 부녀를 빼앗는 일이 일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악정을 개선할 목적으로 창의를 일으켰다”
-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 겸 통령(統領) 손병희
“동학의 수령은 최시형이었으나 연로하므로 나를 통령(統領)으로 추천하여 사실상 내가 수령으로 있었고 전라도 전봉준과 3인이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전봉준장군은 호남대접주(손병희통령의 휘하), 3인은 김연국, 손천민, 손병희
2. 준비된 독립선언서 발표 계획을 확정 (1919년 1월하순)
- 동지를 모집할 것
-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
- 일본정부 및 조선총독부에 의견서를 보낼 것
- 미국대통령에게 건의서를 보낼 것 등
*2월1일 송병준은 거부하면서, “독립운동을 할려면 주의하여 하라”
3. 천도교 교도는 300백만
- “천도교의 교안이 있는데 그 수는 약 3백만명이고 의무를 다하고 있는 교인이 2백만 가량이다”
4. 천도교 자금 6만원은 상해임시정부수립 자금
- “비서 김상규에게 3만원씩 2회에 6만원을 대여했는데 안동현에 살고있는 장수근으로부터 만주산 좁쌀을 조선으로 수입하여 궁민(窮民)을 구제할 생각으로 천도교 사업이다”
- (문)일제검사, “그 6만원은 독립운동에 사용할 목적으로 상해에 임시정부수립자금 등으로 썼는가?”
- “그렇지 않다”
* 6만원 ≒ 현재가치 90억 원
* 김상규 : 손병희 선생 수행비서로 자택에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던 독립운동자금 30만원 일제에게 강탈당함
* 장수근 : 의친왕 이강의 외사촌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 활동, 형 장인근은 이강의 수행 무관으로 정보 교류한 것으로 추정
* 의친왕 이강 : 손병희와 부자의 연을 맺고 천도교에 입교, 독립운동의 성지 봉황각 건립 협의 등 대한제국(황실)의 대표로 독립운동을 한 고종의 황태자, 1919년 대동단[두암 전협(동학혁명 당시 충주접주, 최익환(일진회 간부로 손병희 사람) 등 손병희선생의 휘하 천도교도 및 독립운동가)의 주도로 상해 망명하려다 실패
5.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제1조)
가. 민주정체
(답) “민주정체로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생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유럽전쟁이 한창일 때 교도들과 우이동에 갔을 때,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란 것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문) “조선이 독립되면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는가?” *1919년 7월 14일 손병희 심문조서(경성지방법원) |
나. 민주공화제
“그대들이 독립을 선언하면 황제 등의 수뇌는 누구로 하여금 시킬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인종익*은 “현금의 세계를 보건데 모두 민주공화정체이므로 이에 따라 물론 민주공화제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고 답변함. *1919년 3월 5일 청주경찰서에서 진행된 재판 *인종익 : 천도교인으로 충청도․전라도 3․1독립선언서 배부책임자 |
손병희는 독립 후 한국의 정체로 민주공화제를 희망하였습니다. 즉, 그는 왕조주의 대신에 국민된 지도자가 다스리는 정치를 구상하였던 것입니다.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의 꿈과 민족운동」, 조규태, 2013 |
6. 기타
○ 의암 손병희선생 추모가
‘너그러운 얼국 별빛같은 눈 /눈앞에 아직도 계신듯 하이/넓고 큰 포부와 불굴의 정신/ 하늘이 한국에 보내신 위인/태산고악 같은 지도자셨네’...1절
‘왜옥에 병들어 몸을 바치다/오오 민족의꽃 손의암 선생’...4절
*박종화 작사, 나운영 작곡/1959.10.8. 묘비제막식때 제정, 동덕여고합창대가 처음으로 제창
○ 서문(의암손병희선생전기)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떠나서 어찌 대한민족의 역사를 논할 수 있으며 민족신앙과 근대적인 혁명정신 독립정신인들 운위할 수가 있을 것이냐. 인내천의 민주주의 평등사상과 후천개벽의 구원한 혁명정신과 보국안민의 자주독립정신은 오늘에도 정녕 대한국민의 건국이념과 헌법정신속에 살아있어 약동하고 있는 것이다. 1922년 5월에 선생은 일제의 옥고를 치른 여독으로 영면 순국하였으나 선생이 남긴 불멸의 업적과 유훈은 기어코 오늘의 대한민국을 빛나게 하였다,
*1967.5.19. 편집위원장 이선근












